푸르른
남한강물이 감돌고 있는
천년고찰이자 나옹선사의 열반 성지 신륵사에
맑고 향기롭고 조용한 열반의 기운이 넘쳐나고 있었다.
드넓은 강변에 위치한 신륵사는 수도시민의 젖줄인 남한강 중간 지점에
위치한 수려한 자연 경관을 지닌 명찰로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나투어 주고 있었다.
경칩
하루 전날이 되어서
그런지 사방에서는 개굴개굴 개구리들이
울음을 터트리고 신륵사 극락보건에서는 적막을 깨트리는
스님들의 염불소리가 바람결에 울어주는 풍경소리와 더불어 드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우람한 모습으로 입구에
새로이 지어진
세종문을
지나니 황포 돗대와
조포 나루의 그림이 두눈에
들어오고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 물결 위엔
수많은 청둥 오리때가 물위를 노닐고 있으니 자연의
아름다움은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묘법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강월간
정자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는 남한강변의 수려한
모습에 흠뻑젖어 ‘붉게 핀 진달래’라는
시 한수를 읽어보면서 기암괴석의 웅장한 모습에 취하여
자리를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로서 어느날 원효대사의 꿈에 흰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르키며 신성한
사람이 살 것이라고 일러준 후 사라지니
그 말에
따라 그 자리에 있는
연못에 다가 절을 지으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잘 되지 않아서 원효대사가 7일동안
기도정성을 드리니 9마리의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 그곳에 절을 지을 수가 있었다고 전해져오고 있으며, 고려 고종때에
건너편 마을에 용마가 나타나 겉잡을 수 없이 사나웁게 날뛰니 이를 붙잡을
수가 없었는데,이때 인당대사가 나아가서 용마의 고삐를 잡으니 바로
이 용마가 순해지었다고 해서 이는 인당스님의 원력이기에 이를
신력(神力)으로 용마를 제압했다 하여,신력의 신(神)자와
제압할 륵(勒) 신륵사라고 했다고 하며, 그 외에도
나옹선사가 용암부군에 용마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니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례를
가지고 말을 다스렸다는 등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사찰인것이다.
이
신륵사에는
보물 제 18호로 조사당,
225다층석탑, 226전탑, 228호 보제존자 석종.
229호 보제존자 석종비, 230호 대장각비. 231호 보제존자
석종앞 석등이 있으며, 128호 경기 유형문화재 극락보등이 있는데, 신륵사는
신륵사는 경기도 여주 땅 남한 강물을 앞에 하고, 뒤에는 봉미산이
나지막하고도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도량으로써,
수령이 600년이 된 참나무와 은행나무,
향나무 등이 세월의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다.
목은
이색선생의
흔적과 공민왕
부모의 명복을 기원했던,
대장각기비는 오늘도 수많은
세월풍파를 지세우며, 신륵사 도량을 지키고 있으며,
역사를 빛내고 국가의 위업을 이룩하니
불법을 크게 흥융시켰던 나옹선사를
비롯하여 조선조 태조 이성계의
왕사를 지낸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입적을
하시는 등
이 신륵사는 고려말과 조선 초기의
훌륭한 큰 스님 두분의 행적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신륵사 조사당에는 지금도 두분 스님의 영정이 모셔있는것이다.
그 동안
몇차례 참배를
다녀온 적은 있었으나,
경내 곳곳을 다니면서, 참배하기는
이번이 처음으로써, 이세상 모든일들이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듯이 그냥 지나쳐 보기만 해왔던 신륵사였는데,
천년의
세월을 지세우며,
수 많은 큰 스님과 불연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이제부터라도
사찰이나, 사적지, 유적지, 명승지등을 돌아 볼때에는 남들과 같이
그냥 관광하는 모습의 참배가 아니라 참배하고 공부하는
마음에 발걸음이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져
보면서 맑고 수려한 신륵사를 떠나왔던 것이다.
김 경 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