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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걸어온 서예의 길

죽향 2012. 4. 18. 11:13

 


내가걸어온 서예의 길

2001년 새해가 돌아왔다.
종단의 인사방침에 따라 8년 동안 지내왔던 서울 망우리에 있는 삼룡사 주지를 그만두고
포항 황해사의 주지로 가게 되었다 .별로 한 일도 없거니와 이런 소리 저런 소리도 제법 많이도
환태평양 시대를 맞이한 우리나라의 남동해안에 자리한 포항 땅을 몇 번 가보긴 했으나 어디가
어딘지 모두가 낯설고 물 설은 도시였던 것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철강도시로 태어난 포항은
포구의 항도이기에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이 사람들의 성품도 다른 곳하고는 다른 점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포항 황해사 주지로 취임을 하고 난 이후 평소에도 많이 하고 싶었던 서예공부이기에 전임 김무원
주지스님께서 사찰을 짓고 난 다음 서예교실을 만들어 놓았기에 마음속으로 ‘야! 이제 되었다
내가 늘 해보려고 생각했던 서예공부가 여기 있구나. 이 서예교실에서 서예를 배워보자’고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그러나 시작이 그리 쉽지가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오늘 내일 시작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여러 차례 해보았으나 실천이 쉽지 않았다.
이 핑계 저 핑계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차일피일 미루다가 드디
어 2001년 6월 달에 서예교실에
입문을 하여 제일 먼저 배우기로 한 서예교본이 을령비였다.

서예를 배우겠다고 처음 붓을 잡는 순간 많이도 부끄럽고 남사스러웠다. 왜냐하면 ‘스님’하면 세상
사람들은 글 한줄 정도는 쓸 줄 아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름 석 자도 쓸 줄을 모르고 있으
니 창피하기가 그지없었다. 그러나 ‘한번 해보자 남들도 다 하는데 나라고 못할 것이 뭐있

나 부끄럽고 창피스럽지만 몇 년 만 참고 공부하면 오늘의 이 부끄러움이 크나큰 공부의
밑천이 될 것인데’ 하는 마음으로 한 점 한 획을 그으면서 시작한 서예공부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이듬해 2002년 5월 달에 생애 최초로 을령비 절임글로서 영일만 서예대전에 입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 그 글씨를 보게 되면 형편없는 글이지만 나에게는 가장 소중한
서예임이 틀림없는 것이다. 그해 가을 구미 정수서예대전에 입선을 하고 경북서예전람회에
입선을 하는 등 2002년도 3군데의 공모전에서 입선을 하고나니,
이 세상을 모두 얻은 듯이 무척이나 보람이 있었고 자신감이 생겨났던 것이다.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약 1년여의 시간이 흘러 2003년도에도 포항 영일만과 구미정수대전, 경북서예전
람회 등에 입선을 하고나니 새로운 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

황해사 서예교실은 말 그대로 문화교실의 성격이 있는 만큼 평생을 두고 서예공부를 하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당시 황해사 교무이자 서예실을 운영하고 있는 창허 김정동선생을 찾아 지도를
받으면서, 평생을 두고 배울 서예선생님을 소개해 달라고 하였더니 자신이 지도를 받고 있는
예천에 계시는 초정 권창륜 선생님에게 배우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김정동선생은 구인사에 다니는 종도이며, 소승과 같은 동향으로 안동이 고향이고, 같은 종친으로서
훌륭한 서예가이며, 현재는 대구에 있는 대학에서 한문 및 서예학교수로 재직 중에 있는 분이
다.창허 김정동선생의 소개대로 예천군 용문면에 있는 초정 선생님의 자택을 찾아 인사를 드리
고 서예를 배우러 왔다고 말씀을 드리니, 초정 선생님께서 반가이 맞이해 주시면서 스님께서
서예를 배우고자 하시니 열심히 공부하십시오. 하면서 서예의 기본에 대하여 첫 날 첫 번째
공부가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초정 권창륜선생님은 여초, 일중 선생님의 제자로서 30대 초반에 스승으로부터 인증을 받았고,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최고로 인정을 받는 서예대가 어른이신데, 고향은 예천 용문이
며, 서울 인사동에서 서예를 지도하시면서 매주 일요일은 고향인 예천 자택에서 고향 분들을
비롯한 영남지역의 분들을 지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초정 선생님의 문하에 들어간 때가
2003년 8월 달이었던 것이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서예공부였기에 열심히 노력을 하였다.

열심히 노력했다 해도 서예학원을 하는 분들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 연습이었지만 승려로서
시간이 나는 대로 공부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승용차에 집필 묵을 실고
서 전국 말사의 정기 법회를 다니면서 공부를 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이듬해 2004년 6월 달에 미술협회 경북지회가 주최하는 경북미술대전과 우리나라
최고권위의 대한민국 미술대전이 개최되는데, 선생님께 말씀을 드리기를 ‘저 같은 사람도
미술대전에 작품을 출품해도 괜찮은지요’ 하고 말씀을 드리니 작품을 내어보자고 하시는 것이었다.

10년 20년을 공부해도 입선 한번 하기가 어려운 것이 대한민국 미술대전인데 선생님 문하에 들어간
지가 반년 남짓 되었는데 그것도 글을 많이 쓴 사람도 아닌데 허락을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절로 신이 났다고 할까 밤낮으로 시간이 나는 대로 쓰고 또 쓰고 연습을 하여 경북도전(미협)
과 서울의 대한민국 미술대전에 출품을 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미얀마 성지순례를 다녀왔는데 출품을 했다는 것에만 의미를 두고 있었는데,
이것이 웬일인가 경북도전에 특선이 되었고, 더더욱 놀란 것은 붓을 잡은 지가 만2년이 되지
않았고, 선생님 문하에 들어간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기라성 같은 대선배 대가들을 놔두고
입선이란 영광을 안겨 주신 것이다.대한민국 미술대전의 입선은 선생님께서 보살펴 주시지 않으
면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또 드리면서 가르침에 어긋남이 없도
록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라고 다짐을 하였던 것이다.

이로부터 경북도전에는 2005~2006년 특선에다가 2007년도에는 영예의 대상을 받으면서 한발자욱을
더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공부를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2006년 1년 동안 11개의 공모전에 출품을 하기도 하였기에 2006년도
에 경북 경산시전에서 우수상을 받아 2007년도에는 추천작가가 되었고, 2008년도에는 40년 역
사의 경주 신라미술대전과 포항 영일만의 추천작가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2006년도에는 영남 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기도 하였던 것이다.

전국에서 매년 시행되고 있는 각종 공모전이 약 250여 개가 있다고 하는데, 뭐니 뭐니 해도 우리나라
의 최고 권위의 공모전은 대한민국 미술대전이며 지방의 공모전도 그 지역에서는 제일 권
위 있는 미협지회에서 주관하는 공모전으로서 그동안 포항, 경주, 경산, 영남, 경북도전 등에서
대상, 최우수상, 우수상, 특선, 입선 등을 하면서 졸업을 하게 되었고,
구미 정수와 서울시전 대전광역시전, 안동 국제유교대전 등 몇 군데는 그만두기도 하였지만 모든
역량을 대한민국 미술대전에 초점을 두고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어려운 과정의 대한민국 미술대전에 2006년도에 입선을 한 번 더 한 다음 2007년도에
약 2000여 편의 응모작 중에 46편이 당선된 특선에 선정이 되어 이제는 명실 공히 서예인
으로서 당당히 서게 되었다는 자부심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2009년도에 또다시 특선을 하게 되어 이제 대한민국 미술대전 졸업점수에 2점이 부족한
8점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제 운이 좋아 2010년도에 특선을 하게 된다면 아직까지 불교계 스님들이 미술대전의 초대 작가로
등단한 분이 없기 때문에 불교계 최초 1호의 초대작가가 되는 것이다. 20년, 30년 서예인생을
걸어와도 입선 한번 하기도 쉽지 않은데,
그 어떤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고 해도 미술대전과는 비교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바로 대한민국 미술대전인 것이다. 그동안 많은 부정사례가
발생이 되어 정부에서 주관해 오던 국전을 민간단체에 넘기어서 미술대전이란 이름으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서예가, 미술가, 도예가, 서각가, 조각가, 미술디자이너들이 참여하는 이 미술대전을 거쳐야
우리나라 그 어디에 나가더라도 인정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10년이 되지 않은 기간 동안
스님이라는 이미지를 잘 보살펴 지도해 주신 초정 선생님의 덕분으로 남들보다 먼저 나아갈
수가 있었던 것이 오늘날 나의 서예인생의 길인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서예계의 이력은 남보다 빨리 갖추었으나 실제 글씨는 형편이 없는 졸품
이라는 것이기에 무한히 노력을 해야 하는 숙제가 남아 있으니 마음이 무척이나 무거운 것이다.
그래서 이제 남은 것은 한 가지 목표만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방공모전에서 입선에서 대상
까지 다 받아 보았기에 미술대전에서 상을 받는 것만이 남아 있다.
그래서 금년에는 대상에
도전을 해보고자 하는 것이다.기회는 금년이 마지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안될 때 안 되더라도 도전정신이 있어야 하기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한번 시작을 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꼭 대상을 받아야 되고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정신이 공부에 밑거름이
되기 때문에 결심을 해보는 것이다.
미술대전의 대상은 크나큰 운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글도 제대로 써야 하고 인과관계도 잘 유지
해야 하며 몸과 마음에 정성을 다해야 한다. 서예를 배우면서 세상을 많이도 공부했다.맑고
깨끗한 종이 위에 검은 먹물로써 글을 쓰는 그 모습은 하나의 예술이며 영혼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서예에는 그 사람의 혼이 서려져 있는 것이다. 자신만의 기법 기능이 스며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수많은 서예선생님들과 미술계 분들을 만나보면서 새로운 세상의 여러 가지 유형을
보고 듣고 배울 수가 있었다.
서예란 참으로 아름답고 거룩하고 찬란하게 빛이 난다고 할 수 있다.
서예공부를 하다가 보니 나의 삶 일부도 바뀌었다고도 할 수 있다.선방 안에 들어가면 묵향을
느낄 수가 있고 서도를 보고 지낼 수가 있으니 참으로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것이다.
지금까지 서예를 하는 동안 아낌없는 지도와 가르침을 주신 은사이신 초정 권창륜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앞으로 서예를 계속하는 동안 선생님의 지도를 더욱더 깊이 받으며 살아갈
것이기에 초정선생님께 다시 한 번 더 열심히 공부를 하겠다는 다짐도 해본다.

또한 초정선생님께 안내를 해주고 각종 공모전을 비롯해 아낌없는 지도를 해준 창허 김정동 선생님과
유정 권성하 선생님, 운대 정해천 선생님, 석은 정규원선생님, 대구의 석저 추진호 선생님,등
선배 도반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면서
끊임없는 노력과 정성으로써 맑고 향기로운 묵향의 선객(禪客)으로 더욱더 갈고 다듬으면서 서예의
길 서예의 인생을 가고자 하는 것이다.


2010년 3월 21일 성룡사 선방에서 김경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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