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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문화단지

죽향 2016. 9. 19. 09:27

백제문화단지


 








 


위치 = 충남 부여군 규암면 부여 IC에서 5분거리


입장료 = 4,000원, 관람 소요 시간은 약 2시간 이상 걸린다.  


 



 


1994년부터 2010년 17년간 약7,000억을 들여서 1,400년전 백제의 문화와 역사를


전체 면적이 327만 6,000㎡에 달한다 재현해 놓은곳이다


 




웅장한 백제문화의 상징인 사비궁 모습을 삼국시대로 재현하여 백제의 왕실 사찰 능사는


부여읍 능산리 유적을 실물 크기로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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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부소산성                솔새김남식


부소산성은 부여를 대표하는 관광지이며 유적지로써 


538년 26대 성왕때 사비천도 이래 660년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123년 동안 백제의 역사를


사비성과 함께 했으며 패망과 동시에 사비성은 모두 불에 탔다.


찬란했던 백제문호를 세계에 알리고자 1994년부터 2010년까지 총 17년간 7,000억을 들여서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합정리에 옛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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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산에 올라가 낙화암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백제의 역사가 아련하게 떠 오르고


다른 왕조와 달리 곳곳에 패망의 상흔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어서


상상력이 빈약한 사람이라도 가슴속으로 흘러드는 애절한 역사에 젖지 않을 도리가 없는 곳이다..


 



 



 


삼충사는 계백과 성충 흥수의 세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57년에 세운 사당이다 


성충은 좌평으로 왕이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바로 잡기 위해 애쓰다 투옥되었으며


흥수는 나당연합군이 공격해오자 탄현과 백강과 지키라고 귀양지에서 간곡하게 당부했다고 전한다


 



 


 



 


군창지(軍倉址)는 백제시대 군량을 비축해 두었던 창고로 1915년 땅속에서 불에 탄 곡식이 발견됨으로써 


660년에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사비성이 공격을 받고 망할 때 모두 불에 타버린 것으로 짐작되고 있으나


현재 정확한 증거는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란사는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백제때 왕들이 노닐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였다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이라는 설이 전하며 백제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을 고려시대에 백제의 후예들이 재건했다 


 






백마강 유람선





 





우리의 옛가요 '추억의 백마강'과 '신라의 달밤'의 가사를 보면


패망의 역사가 어떤 것 인가를 잘 표현해 주는데


지금부터 1,500년전 부여에서는 슬픔을 노래 할 당시


서라벌에서는 술잔으로 흥을 노래하고 있었을 것으로 사료가 된다.


 


 '추억의 백마강'과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잊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아래 울어나 보자.
고란사 종소리 사무치는데 구곡간장 올올이 찢어지는데 누구라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 깨어진 달빛만 옛날 같으리.


 


 '신라의 달밤'의


아~ 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 온다 지나가는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


고요한 달빛 어린 금옥산 기슭에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아~ 신라의 밤이여 아름다운 궁녀들 그리웁구나 대궐뒤의 숲 속에서 사랑을 맺었던가.
님들의 치마 소리 귀속에 들으면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의자왕은 그는 왕의 시호가 없으며 의자(義慈)는 휘(諱)이다
무왕의 맏 아들로 태어나 632년(무왕33)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효성과 형제애가 지극하여 해동증자(海東曾子)라 일컬었다.
642년 친히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성(獼猴城) 등 40여 성을 빼앗았고
이어 윤충(允忠)으로 대야성(大耶城:경남 합천)을 함락시켜 성주인 김춘추의 사위 품석(品釋)을 죽이는 등 신라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듬해에도 당항성(黨項城:남양)을 빼앗아 신라가 당(唐)나라로 가는 입조(入朝)의 길을 막는 등 국위의 만회에 힘썼다.
그러나 만년에는 사치와 향락에 빠져 성충(成忠) ·흥수(興首) 등 충신의 간(諫)을 듣지 않고
국정을 돌보지 않다가 660년 나 ·당(羅唐) 연합군의 침공을 맞게 되었다.
계백(階伯)의 황산벌싸움을 마지막으로 백제의 방어선이 모두 무너져 수도 사비성(泗沘城:충남 부여)이
나 ·당 연합군에 포위되자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웅진성으로 피신하여 후일을 기약했지만 백제 역신 '예식진'이라는 자가 
의자왕을 잡아다 당에게 넘겨 주자 소정방 앞에서 술을 따르며 굴욕적인 항복식을 하게된다
그는 태자 등 1만 2000여 명과 함께 소정방(蘇定方)에게 끌려 당나라에 압송 되었다가
그 곳에서 병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백제의 패망이 주는 교훈     정리 솔새김남식


 


커다란 대륙에서 뻗어나온 한반도에서 팻권을 서로 다투던 삼국시대


신라는 태백산맥이 가로 박혀 북으로 영토를 넓히지는 하지만 백제는 중국. 일본으로 영토를 넓혔다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게 된 이유는 그 당시 신라는 약소국으로 대륙을 꿈꾸는 백제나 고구려가


그들에겐 껄끄러운 존재였기에 동맹을 거절했고 결국 하늘에 신은 신라에 삼국통일의 손을 들어 주었다.


 


피나는 전쟁 끝에 삼국통일을 통해 우리가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피폐해진 백성의 굶주림에


인명이 살상되거나 포로로 잡혀가고 광활한 고구려의 영토를 거의 잃어 버렸다.


승자는 어부지리를 챙긴 당나라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며


어리석은 민족사의 복판에서 백제의 패망이 재 조명되어 민족의 비극을 반성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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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백제로썬 충분히 버틸수 있었으나 내분과 함께 역신의 반란도 한몫을 했으며 


김유신, 김춘주를 삼국통일 위업을 달성한 영웅이라 배웠지만 왜 삼국이 연합해서 당을 격파하지 못 했을까?


그 시대를 살지 않았기에 그 참 뜻은 모르겠지만 지금도 우리는 같은 것을 껵고있다


특히 찬란했던 고구려의 후예 230년 발해 역사에서도 고려와 연합해서 옛 북방 영토를 회복하고


더 나아가 중원을 지배할 야망과 의지를 우리 민족은 왜 불 태우지를 못 했을까 잠시 걱정을 해본다.


특히 500년 하남 위례성 등 678년 백제 역사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불행한 역사는 되풀이하지 않아야 한다. 주절주절 k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