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소니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진 李聖淳은
우리나라 주먹 1위로 공인받고 있다.
아니, 동양 제일의 주먹으로 치는 사람도 많다.
2위부터 5위까지야 사람들에 따라서 순위가 달라지겠지만
아마 주먹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주저없이 시라소니를
첫 손에 꼽을 것이다.
신의주가 고향인 이 불세출의 주먹은 한 마디로 싸움을 위해
태어났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많은 신화를 이뤄낸
사나이다.
그의 주먹경력은 크게 세단계로 나뉠 수 있는데
13세가 되던 해 싸움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기 시작한 시점부터
약관 20세에 이북 최고의 주먹 박두성을 평양으로 날아 가
일거에 때려 눕힌 후 이북 최고의 주먹으로 인정받기까지가
그의 싸움경력 중 초기라 할 수 있겠다.
이 당시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13세 이후부터
20살이 되기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두세번 정도
신의주와 인근지역을 돌아다니며 싸움을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싸움경력이 싸움꾼의 요소 중 가장 첫손에 꼽히는걸로 봐서
그 당시 그는 이때가 수련기였다고 볼 수 있겠다.
그 후 중국으로 날아 가 대륙을 평정하던 시절을
중기로 볼 수 있는데,
20살부터 시작 해 30살 무렵까지 말 그대로 날고 긴다는
일급주먹들만 때려 잡아 그의 성과를 높였다.
이 당시 중국에는 이북에서 손 꼽히는 주먹들도 대거 진출했는데
시라소니 만큼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 했다.
대개 한곳에 정착 해 그 지역으로 들어오는 주먹들만
상대하며 세월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시라소니는 대륙 전역을 떠 돌며 이름있는 주먹들을
직접 찾아 가 때려 눕혔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하겠다.
이 시기야말로 시라소니를 이야기 할 때
그의 주먹인생 중 최고 전성기라 말 할 수 있겠다.
중기를 거쳐 고꾸라 형무소에 복역 중
일본의 주먹들도 차례로 제압 한 후 그는 월남을 하는데
당시 서울에는 다들 알다시피 이정재, 이화룡, 김두한등
소문난 주먹들이 존재했었다.
그러나 대륙에서의 무용담에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허풍까지 씌워 져 시라소니는 월남하자마자 신화적인 존재로
주먹들 사이에서 오르내린다.
그에 걸맞게 그는 월남하자마자 맨발대장과 마사이찌 고영묵을
때려눕히며 화끈한 신고식을 펼친다.
결국 너무나 유명한 동대문의 린치사건으로 인해
(아래 동영상 참조)
불구 직전까지 가지 만
그 후 장면박사의 요짐보(경호원)로 활동하다 주먹계에서
영원히 손을 씻었다.
시라소니에 대한 평가는 주먹계에서 더욱 높이 쳐 주었는데
유지광은 그의 저서에서 역대최고의 싸움꾼으로
그를 거론했으며 만화가 방학기씨는 그의 책에서
싸움을 예술로 승화시킨 사나이라고 평가했었다.
주먹꾼은 아니지만 주먹역사에서 빼 놓을수 없는
연예계의 대통령 임화수는 그의 열렬한 팬이었다.
극장 조라치 시절 지나가다 우연히 그의 신기에 가까운
싸움실력을 본 그는 이후 출근도 하지 않은 채
매일 시라소니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고 하고
동대문파의 원로격인 김사범은 그를 가리 켜
조선의 주먹을 뛰어넘어 동양 최고의 주먹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Message Of Love - Don Bennechi
드라마 '야인시대' 에서 동대문 이정재 사단의 함정에 빠진 시라소니
위 사진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명동을 걷는 '시라소니',
그리고 그의 부음을 전하는 기사이다.
임화수 얘기 나온 김에 '합죽이 김희갑' 폭행사건을 조금 언급하고
넘어 가겠다.
임화수의 "합죽이 김희갑" 폭행사건
한때 연예계에 스며든 ‘검은 세력’ 으로 주먹패들의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곤 했다.
주먹패들의 연예계 ‘침투’ 는 꽤 오랜 ‘역사와 전통’ 을 갖고 있다.
1959년 11월27일.
당대 인기를 누리던 ‘합죽이’ 김희갑이 임화수를 찾아가면서
사건은 시작되었다.
김희갑은 자신의 양해없이 광고가 나간다는 것에 대해
임화수에게 항의했다.
당시 권력의 비호 아래 영화계와 연예계를 장악하고 있던
임화수는 김희갑의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폭행을 하여 갈비뼈가 세 대나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결국 김희갑이 언론에 자신의 피해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임화수는 경찰에 입건됐다.
하지만 임화수는 그해 12월 벌금 3만환의 가벼운 처벌을
받는 데 그치고,
오히려 그 사건 이후 한국영화제작가협회 회장에 취임했다.
임화수의 횡포는 오래가지 못했다.
1960년 4월18일 고려대생들이 서울 종로 거리에서 시위를 마치고
귀가를 하던 길.
깡패들이 이들 시위대에 달려들어 기습 폭력을 자행했다.
임화수와 유지광은 이 사건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돼 구속됐고
결국 형장에서 생을 마감했다.
1961년 이른바 ‘정치깡패’ 로 불린 임화수가
서울 서대문 서울형무소에서 눈을 감은 것이다.
1960년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군사혁명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형이 집행된 것이다.
-
임화수의 "합죽이 김희갑" 폭행사건
한때 연예계에 스며든 ‘검은 세력’ 으로 주먹패들의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곤 했다.
주먹패들의 연예계 ‘침투’ 는 꽤 오랜 ‘역사와 전통’ 을 갖고 있다.
1959년 11월27일.
당대 인기를 누리던 ‘합죽이’ 김희갑이 임화수를 찾아가면서
사건은 시작되었다.
김희갑은 자신의 양해없이 광고가 나간다는 것에 대해
임화수에게 항의했다.
당시 권력의 비호 아래 영화계와 연예계를 장악하고 있던
임화수는 김희갑의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폭행을 하여 갈비뼈가 세 대나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결국 김희갑이 언론에 자신의 피해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임화수는 경찰에 입건됐다.
하지만 임화수는 그해 12월 벌금 3만환의 가벼운 처벌을
받는 데 그치고,
오히려 그 사건 이후 한국영화제작가협회 회장에 취임했다.
임화수의 횡포는 오래가지 못했다.
1960년 4월18일 고려대생들이 서울 종로 거리에서 시위를 마치고
귀가를 하던 길.
깡패들이 이들 시위대에 달려들어 기습 폭력을 자행했다.
임화수와 유지광은 이 사건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돼 구속됐고
결국 형장에서 생을 마감했다.
1961년 이른바 ‘정치깡패’ 로 불린 임화수가
서울 서대문 서울형무소에서 눈을 감은 것이다.
1960년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군사혁명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형이 집행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