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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 기행

죽향 2012. 11. 12. 22:16


  자연과 조화 이룬 가장 한국적인인 궁궐

창덕궁은 1405년 태종 때 건립된 조선왕조의 왕궁이다. 처음에는 법궁인(法宮) 경북궁에 이어 이궁(離宮)으로 창건했지만, 이후 임금님들이 주로 창덕궁에 거주하면서 실질적인 법궁의 역활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한양의 궁궐들이 모두 불탄 후에 경북궁은 그 터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재건되지 않고 1610년 (광해 2년)에창덕궁이 재건된다. 그 후 창덕궁은  경북궁이 재건될때까지 270여 년 동안 법궁으로 사용되였다. 그러나 일반인은 창덕궁  후원인가 비원인가 일반인은 특별한 그 이름에 대해 잘 모르고 있으며 정부에서도

후원은 일반인에게 공개 되지 않고 있다가 예약자에 한해 하루 18회 관람을 시작 한지는

얼마되지 않았다고 생각되는데 필자는 후원에 관광을 하고 난 후 많은 우리 국민이 후원을 보고 우리나라왕궁의 모습들을 살펴볼 기회를 제공해야 겠다는 마음으로 후궁에 대한 사진과 사료를 여기에 옮겠습니다.

자료제공 : 창덕궁 관광재료을 중심으로 편집 하였음을 밝혀 둡니다 .

창덕궁 제일문 돈화문(敦化門)

 

 

창덕궁 후원(昌德宮後苑) 예약접수방법 안내 홈페이지

  http://www.cdg.go.kr/reservation/reserv_01.htm

 

 

창덕궁 후원(昌德宮後苑)

 

자연 지형을 살려 만든 왕실의 휴식처

태종이 창덕궁을 창건 할 당시 조성한 후원은 성종 대에 건립된 창경궁까지 그 영역이 확장 되었다. 이들 궁궐이 다른 궁궐보다 특히 왕실의 사랑을 많이 받은 것은 넓고 아름다운 후원 때문일 것이다.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고 후원이 훼손되어 광해군이 창덕궁과 함께 1610년(광해2)에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 후 인조, 숙종, 정조, 순조 등 여러 왕들이 개수하고 증축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창덕궁 후언은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 마다 아름다운 정자를 만들었다. 약간의 인위적인 손질을 더해 자연을 더 아름답게 완성한 절묘한 솜씨이다. 4개의 골짜기에는 각각 부용지(芙蓉池), 애련지(愛蓮池), 관람지(觀覽)(池), 옥류천(玉(流川) 영역이 펼쳐진다. 창덕궁 후원으로 들어갈수록 크고 개방된 곳에서 작고 깊숙한 곳으로, 인공적인 곳에서 자연적인 곳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하며 뒷산 응봉으로 이어진다. 서쪽 깊숙한 숲 속에 대보단이나 신 선원전 같은 제사 시설이 있는 신성한 곳이다. 세계 대부분의 궁궐 정원은 보고 즐기기 위한 관람용이어서 한눈에 볼 수 있는 장대한 경관이 펼쳐진다. 이에 비해 창덕궁 후원은 작은 연못과 정자를 찾아 여러 능선과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온몸으로 체험해야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후원매표소 입구

 

 

 

 부용지와 주합루(芙蓉池 ․ 宙合樓)

 

휴식과 학문적 용도로 쓰인 아름다운 건물들

이곳은 후원의 첫 번째 중심 정원으로, 후식뿐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하던 비교적 공개된 장소였다. 300평(약 1000㎟) 넓이의 사각형 연못인 부용 지를 중심으로 여러 건물을 지었다. 주합루 일원의 규장각(奎章閣)과 서향각(書香閣) 등은 왕실도서관 용도로 쓰였고, 영화당(暎花堂)에서는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영화당은 동쪽으로 춘당대 마당을, 서쪽으로 부 용지를 마주하며 앞뒤에 틧 마루를 둔 특이한 건물이다. 연꽃이 홀짝 핀 모양의 부용전은 연못에 피어있는 한 송이 꽃의 형상으로 2012년 보물 제1763호로 지정되었다. 행사가 치러지던 영화당은 연못에 면해 있으며, 학문을 연마하던 주합루는 높은 곳에서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다. 하나하나의 건물도 각각 특색 있고 아름답지만, 서로 어우러지면서 풍경이 되는 절묘한 경관이다. 현재는 어수 문을 중심으로 생 울타리인 취병을 재현하여 지역을 구분하고 있다

 

 

 

 

 

 

 

 

 

 

 

   

11 애련지와 의두합(愛蓮池 ․ 倚斗閤)

 

군자의 성품을 닮은 경치

1692년(숙종 18)에 연못 가운데 섬을 쌓고 정자를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 그 섬은 없고 정자는 연못 북쪽 끝에 걸쳐 있다. 연꽃을 특히 좋아했던 숙종이 이 정자에 애련(愛蓮)‘이라는 이름을 붙여, 연못은 애련지가 되었다. 숙종은 ’내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새 정자의 이름을 지은 까닭을 밝혀 놓았다. 애련지 서쪽 연경당 사이에 또 하나의 연못이 있는데, 원래 이곳에 어수 당이라는 건물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없어졌다. 1827년(순조27) 효명세자는 애련지 남쪽에 의두 합을 비롯한 몇 개의 건물을 짓고 담장을 쌓았다. 현재 ’기오헌(奇傲軒)‘이라는 현판이 붙은 의두합은 8칸의 단출한 서재로, 단청도 없는 매우 소박한 건물이다. 바로 옆의 운경거(韻警居)로 추정되는 건물은 궐 안에서 가장 작은 한 칸 반짜리 건물이다.

 

 

 

 

 

 

12 연경당(演慶堂)

 

사대부 살림집을 본뜬 조선 후기 접견실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의례를 행하기 위해 1828년(순조 28)경에 창건했다. 지금의 연경당은 고종이 1865년쯤에 새로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사대부 살림집을 본떠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단청을 하지 않았다. 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되어 있지만 내부는 연결되어 있는 점도 유사하다. 그러나 일반 민가가 99칸으로 규모가 제한된 데 비해, 연경당은 120여 칸이어서 차이가 난다. 서재인 선향재(善香齋)는 청나라 풍 벽돌을 사용하였고 동판을 씌운 지붕에 도르래식 차양을 설치하여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 후원 높은 곳에 있는 농수정(濃繡亭)은 마치 매가 날개를 편 것같이 날립한 모습이다. 안채 뒤편에는 음식을 준비하던 반빗간이 있다. 고종 이후 연경당은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고 연희를 베푸는 등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13 존덕정 일원(尊德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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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형태의 정자들

이 일대는 후원 가운데 가장 늦게 갖춰진 것으로 보인다. 원래 모습은 네모나거나 둥근 3개의 작은 연못들이 있었는데, 1900년대 이후 하나의 곡선형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관람지라고 부른다. 연못을 중심으로 겹 지붕의 육각형 정자인 존 덕정, 부채꼴 형태의 관람정(觀纜亭), 서쪽 언덕 위에 위치한 길쭉한 맞배지붕의 폄우사(砭愚射), 관람정 맞은편의 승재정(勝在亭) 등 다양한 형태의 정자들을 세웠다. 폄우사는 원래 부속 채가 딸린 ‘r'자 모양이었으나 지금은 부속 채가 없어져 단출한 모습이고, 숲 속에 자리 잡은 승재정은 사모지붕의 날렵한 모습이다. 1664년(인조22)에 세워진 존덕정이 가장 오래된 건물이고, 관람정과 승재정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14 옥류천 일원(玉流川)

 

다양한 각도에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곳

옥류천은 후원 북쪽 가장 깊은 골짜기에 흐른다. 1636년(이조 14)에 거대한 바위인 소요 암을 깍아 내고 그 위에 흙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들여 작은 폭포를 만들었으며, 곡선형의 수로를 따라서 흐르는 물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연(有觴曲水宴)을 벌이기도 했다. 바위에 새겨진 ‘玉流川’ 세 글자는 인조의 친필이고, 오언절구 시는 이 일대의 경치를 옳은 숙종의 작품이다. 소요정(逍謠亭). 태극정(太極亭), 농산정(籠山亭), 취한정(翠寒亭), 청의정(淸漪亭) 등 작은 규모의 정자를 곳곳에 세워, 어느 한 곳에 집중되지 않고 여러 방향으로 분산되는 정원을 이루었다. 작은 논을 끼고 있는 청의정(淸漪亭)은 볏 집으로 지붕을 덮은 초가이다. (동궐도)에는 16채의 초가가 보이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청의정만 궁궐 안의 유일한 초가로 남아 있다.

 

 

 신 선원전 일원(新瑄源殿)

 

역대 임금의 어진을 모셨던 곳

이곳에는 원래 임진왜란 때 군대를 보내 준 명나라 신종(神宗)을 제사 지내기 위해 설치한 대보단(大報壇)이 있었다. 일제감점기인 1921년에 대보단을 철거하고 새로운 선원전을 지어 구 선원전에 모셨던 어진들을 옮겨 왔다. 이처럼 후원 깊숙한 곳으로 선원전을 이전한 까닭은 중국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조선 왕실의 상징성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부속건물인 의효전(毅孝殿)은 원래 경복궁의 문정전을 덕수궁으로 옮겨다가 다시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태조부터 순종까지 12명의 어진이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했다가 실수로 불타 없어졌다. 

 

후원의 아름다운 단풍